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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황룡사 목탑'
매경 춘추 박일준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천년 고도(古都) 경주에는 오래전 거대한 목탑이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황룡사 9층 목탑은 "철반 이상 42척, 이하 183척"이라 전한다.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높이 약 70~80m에 달한다. 당시 일본의 호류지 5층 목탑(약 32m)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로, 동아시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었다. 백제의 침공이 거듭되던 645년, 신라 선덕여왕은 국운을 되살리기 위해 목탑 건립을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 신라에는 그만 한 기술이 없었다. 여왕은 고심 끝에 적국이던 백제의 건축 장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고, 조카사위인 '이간(伊干) 용춘(龍春)'에게 총책임을 맡겼다. 200여 명의 장인들이 참여해 마침내 탑이 세워졌다. 국가의 위기 앞에서 국경과 적대의 벽을 넘어선 협력, 서로 다른 문화와 기술이 만들어낸 결실이 바로 황룡사 9층 목탑이었다.
약 1400년이 흐른 오늘, 경주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탑이 세워진다. 오늘 환영 만찬을 시작으로 나흘간 'APEC CEO Summit'이 열린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아태지역 21개국 정상,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등 글로벌 리더 1700여 명이 참석한다.
이번 서밋을 주관하는 대한상공회의소는 'Bridge, Business, Beyond'를 주제로, 전 세계의 자본·기술·혁신·정책·인재를 잇는 '슈퍼 커넥션(Super Connection)'의 무대를 마련했다. 지금 세계는 AI, 디지털 전환, 기후위기, 공급망 재편 등 유례없는 복합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과제들은 어느 한 나라나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은 연결과 협력의 힘이다. 목탑을 높이 세우려면 각층이 균형을 이루고, 목재·돌·금속이 하나의 구조로 맞물려야 한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도드라지면 전체가 흔들린다. 거대한 목탑을 쌓아 올리듯, 각 나라와 기업이 가진 기술과 역량이 정밀하게 맞물려야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다.
이번 서밋은 20개 세션과 85명의 연사가 참여해 AI, 친환경 공급망, 금융, 바이오 등 미래 의제를 중심으로 실행 가능한 해법을 제시한다. 정상과 CEO 간 1대1 미팅을 통해 투자와 협력이 구체화되고, 퓨처테크 포럼, K-Tech 이노베이션 쇼케이스, K-뷰티·웰니스 페어 등을 통해 한국의 산업 경쟁력과 문화적 역량이 세계와 만난다.
경주 APEC의 경제 효과는 약 7조4000억원, 고용 창출은 2만2000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진정한 성과는 숫자에 있지 않다. 경주 APEC을 통해 국가 간·기업 간 네트워크가 현실의 힘으로 바뀌는 순간, 대한민국은 변화를 지켜보는 나라가 아니라 변화를 이끄는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신라가 백제 장인의 손길을 받아 거대한 탑을 세웠듯이, APEC을 계기로 우리는 세계와 손잡고 '현대판 황룡사 목탑'을 세워나가야 한다. 천년 고도 경주에서 대한민국이 세계와 이어지고, 그 연결의 힘이 지속가능한 번영의 토대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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